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문단 편집) == 대통령이 되기 전 == 니야조프는 [[1940년]] 2월 19일에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아시가바트]] 외곽 그프자크(Gypjak)시에서 태어났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아타므라트(Atamyrat)는 [[독소전쟁]] 때 징집되어 [[1942년]] 캅카스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다만 이에 대한 공신력 있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어머니 구르반솔탄(Gurbansoltan)과 두 형제를 포함한 나머지 가족은 [[1948년]] 10월 6일에 있던 [[아시가바트]] 대지진 당시 사망했다. [[고아]]가 된 그는 먼 친척이 찾아올 때까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소련]]의 [[고아원]]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1959년]]에 학교를 마쳤고, [[1962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가입해 정치에 입문했다. [[1967년]]에는 전자 공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이후 빠른 승진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하여 [[1985년]] 만 45세의 나이에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투르크멘 SSR]]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니야조프를 공산당 서기장에 임명한 것은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였는데, 고르바초프가 투르크메니스탄에 대한 정책 방안을 제시할 때 니야조프는 '자신의 나라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게 5년 간 서기장으로 재직하였고, [[1990년]]에는 투르크멘 SSR의 초대 직선제 대선에서 압승, [[소련 해체]] 이후 무난하게 [[투르크메니스탄]]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4차원적인 행동을 해보일 사람은 결코 아니었고, 오히려 밑바닥에서 정말 열심히 노력하여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다만 8월 쿠데타 미수사건때 쿠데타군을 지지하다가 철회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는데 중앙정치로 나아가기에 감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독립 이후에 니야조프에게 충언을 해 줄 부하들과 주변인들이 사라지면서[* 그의 영부인인 무자 니야조바(Муза Ниязова, Muza Nyýazowa)는 이미 1980년대 후반에 모스크바에 정착하며 살았고 남편인 니야조프가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이었을 때에도 투르크메니스탄에 살지 않고 주 모스크바 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에서 근무하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즉,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남편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 죽을 때까지 별거생활을 해왔다는 것이었으며, 그래서인지 남편이 한창 괴짜 기질을 내보였을 때에도 제어를 할 만한 위치에 있던 인물이 아니었던 셈이었다.] 그는 점차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고, 그 이후부터 후술할 우스꽝스러운 기행들이 시작되었다.[* 니야조프가 처음 독립국가의 대통령으로서 취임식을 가졌을 때에는 [[쿠란]]을 대고 선서했는데 이를 두고 투르크메니스탄인들은 니야조프가 독실한 무슬림이라서 이슬람주의식 통치방식을 도입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1992년에 니야조프는 형식적인 국민 투표를 통해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 권한대행에서 투르크메니스탄 대통령으로 등극했고, 정당을 [[투르크메니스탄 민주당]] 하나만 남기고 모두 금지시킨 것은 물론 자신을 총리, 여당 사무총장, 각료회의 의장 겸 '튀르크멘바시'로 등극시켰다. 그리고 1994년에 니야조프는 공식적으로는 99.9%의 찬성율을 보인 국민투표를 통해 2002년까지 임기를 '연장'했으며, 1999년 12월에 니야조프는 자신을 구소련 소속 국가들 중 최초의 '종신 대통령'으로 선포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